[미디어펜=김규태 기자]유엔 안보리 등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 결의를 통해 막으려는 북핵·미사일 도발은 지난 20년간 이어져왔다.
우리 정부로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수준이 어디까지 닿았고 어떤 핵보유 과제가 남았는지가 가장 큰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목이다.
지금의 고도화 수준을 가능케한 북한 핵·미사일 개발사는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핵·미사일 개발의 원천은 기술종주국인 소련이다. 김일성은 6.25전쟁 직후부터 소련의 미사일 무기체계 획득에 힘썼고, 1964년 소련의 지원 하에 영변 핵연구소를 건설했다.
1963년 소련에게 탄도미사일 개발 지원을 요청했던 북한은 1969년 소련으로부터 지대함미사일과 FROG-5/7 지대지미사일을 받았고, 1971년 중국과 DF-61 탄도미사일 개발에 합의한 후 중국으로부터 지대공미사일과 지대함미사일 등 기술지원을 제공받았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이 한창이던 이집트로부터 파병 거래를 통해 소련제 스커드-B 미사일 장비와 매뉴얼, 운용교범을 넘겨받은 북한은 본격적인 미사일 독자개발에 나선다.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1984년 북한은 스커드-B 미사일의 독자개발 버전인 화성5형 미사일을 생산한 후 화성6형(스커드-C) 미사일의 개발에 들어갔다.
1987년 노동미사일 개발을 시작하게 된 북한은 본격적인 중거리탄도미사일(MRBM) 연구에 착수한 뒤 1991년 화성6형 미사일의 양산을 시작하고 노동미사일 시제품을 만들어 결국 1993년 5월 노동미사일 발사시험을 진행했다.
1995년부터 노동미사일을 전력화해 배치하기 시작한 북한은 1998년 8월 노동미사일보다 사정거리가 훨씬 긴 최초의 대륙간탄도탄(ICBM)급 '대포동 1호'를 발사하면서 전세계를 경악케 한다.
당시 대포동 1호는 1600km의 사정거리를 보여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에게 충격을 안겼다.
2006년 7월 대포동1호를 대폭 개량해 사정거리를 6700km로 늘린 대포동2호를 시험발사한 북한은 2007년 화성-10형(무수단)을 실전배치한 후, 2009년 및 2012년 4월 위성궤도 발사체 시험실패를 딛고 2012년 12월 은하3호 장거리로켓을 발사해 위성을 궤도에 성공적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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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현지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월3일 보도했다. 김정은 위원장 뒤 안내판에 ICBM급 탄도미사일로 추정되는 화성-14형의 '핵탄두'라고 적혀있다./사진=연합뉴스 |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2017년 들어 동해상에서 태평양상으로 작전 반경을 넓히는 등 획기적으로 변모한다.
지난 3월18일 액체연료를 쓰는 신형엔진 연소시험의 성공을 통해 북한은 괌 타격능력을 과시한 화성-12형을 비롯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인 화성-14형의 1단 추진체를 만들게 된다.
북한이 ICBM급으로 내세우는 화성-14형은 최대 사거리 5000km인 화성-12형 엔진을 1단 추진체로 쓰되, 여기에 2단 추진체를 추가해 사거리를 8000~9700km까지 늘려 미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도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전문가들은 향후 북한이 화성-12형과 화성-14형을 병행 시험발사해 타격능력 고도화를 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화성-12형 사거리를 감안해 성능을 계속 높여나가는 시험에 주력하면서, 지난 7월 2차례 고각으로 시험발사한 화성-14형을 정상각도로 발사해 성능을 재차 검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미사일 타격능력 고도화를 마치면, 재진입체 150kg 및 핵폭탄 500kg 등 약 700kg 무게의 핵탄두 탑재를 상정한 탄도미사일을 내년 상반기 중 시험발사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화성-14형에 핵물질을 뺀 핵탄두를 탑재해 실거리로 발사하고 이를 대기권에 재진입시킨 후 표적지에 맞추는 시험을 실시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통한 재진입기술 완성 및 핵탄두탑재 실전실험이 북의 핵보유국 선언에 앞서 남아있는 주요 과제라고 보고 있다.
북한의 핵보유국 선언을 가능케 하는 지난 핵개발 역사는 탄도미사일 개발보다 오히려 앞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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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 4월15일 김일성 주석의 105번째 생일(태양절)을 맞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중인 열병식에 신형 ICBM으로 추정되는 미사일을 최초 공개한 모습이다./사진=연합뉴스 |
1946년 핵개발 이론적 기초를 다지는 물리수학부를 김일성대에 개설하고 1955년 인민군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했던 김일성은 1964년 소련의 지원 하에 영변에 핵연구소를 건설하면서 본격적인 핵개발에 나섰다.
영변 핵시설을 급속히 확대해나갔던 북한은 1979년 자체 기술로 실험용 핵반응로 건설에 착수해서 1985년 플루토늄 추출 실험실을 건설한 후 1986년 핵반응로의 정식 운전을 시작했다.
1987년 '사용후 핵연료' 가공공장으로 활용한 화학방사실험실 건설에 들어갔던 북한은 1990년 최초의 핵 기폭장치 개발을 완료했다.
이후 일련의 기술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수차례 동결과 재개를 반복해왔던 북한은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을 단행한 후 2009년 5월 2013년 2월 2016년 1월 및 9월, 2017년 9월 등 총 6차례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6년 북한의 첫 핵실험 직후, 당시 러시아 이바노프 국방장관은 북한의 9번째 핵보유국을 인정하면서 핵탄두의 경량화 및 다양화를 경고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미 탄도미사일에 탑재 가능한 핵탄두 20~25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위력은 15~250kt(킬로톤)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지난 20년간 북한의 끊임없는 핵 미사일 도발은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이 위장전술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핵개발에 대한 집념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있는 김정은의 다음 선택이 무엇이 될지 주목된다.
[미디어펜=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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