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넘나드는 촬영·제작·유포·소비...지워지지 않을 화인
삭제 어렵고, 피해자 낙인찍는 구조 잔인한 인성 폭력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무차별적이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범죄는 왜곡된 성에 대한 죄의식조차 없다. 이는 사이버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픈 현실이다.

단지 성적 모럴헤저드가 아니라 사회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암적인 존재로 자라온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잘못된 성 관념이 악의 세습으로 이어지면서 사회 통합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마저 들게 한다. 

이에 본보는 디지털 성범죄의 현황과 구조적 문제 진단,  범죄 엄단과 예방을 위한 양형기준 강화, 성인지 지수 향상, 해외 사례 등을 중심으로 '내 손안에 악마가 산다 - 제2의 n번방 막아라'를 주제로 심층 기획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 순서 ①n번방 사태로 본 디지털 성범죄 현주소/②악마는 디테일에 있다?…2차 피해는/③'솜방망이' 처벌이 부른 악순환/④피해자 위한 사회 안전망은?/⑤[르포]아이들 향해 랜선 타고 엄습하는 '검은 손'…영국 법은/⑥[르포]미국에서 n번방 사건 일어났다면?/⑦[르포]여성인권 선진국 스웨덴…강력한 법이 답/⑧'제 2의 n번방 막아라' 전문가들 목소리는[편집자 주]

[제2 n번방 막아라-①] n번방 사태로 본 디지털 성범죄 현주소

   
▲ 성착취물 공유 텔레그램 대화방인 'n번방' 운영자 '갓갓' 문형욱(24)과 함께 피해자를 협박한 안승진(25)이 6월 23일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경북 안동시 안동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미디어펜=특별취재팀 김규태 기자] 지난해 가장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일명 'n번방' 사건. 당시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노예'라고 부르면서 성 착취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고 신상정보까지 공유하는 텔레그램 채팅방이 있다는 사실에 온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n번방과 박사방, 어떻게 피해자 양산했나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해킹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알몸이나 성교행위 등을 찍어 올리는 트위터 비밀계정을 운영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사이버수사대입니다, 음란물 제작 및 유포 혐의로 신고되었으니 아래 링크를 통해 진술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해킹 링크를 보냈다.

여성이 링크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계정을 해킹해 신상정보를 털었고, 이를 통해 그들을 협박해 음란 동영상을 강제로 찍어 올리게 했다.

n번방 사건에서 불거진 가장 큰 문제는 두 가지로 꼽힌다. 주 피해자층이 미성년자(고등학생이 대부분으로 추정)였다는 점, 그리고 해킹을 통해 협박받은 피해자들 본인이 직접 사진과 영상을 촬영해 범죄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신고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n번방은 지난해 9월 사라졌지만 대신 다른 방들이 생겨났다. '박사'라는 닉네임이 운영한 '박사방'이 대표적이다. 박사방은 n번방과 다른 방식이었다.

박사방 운영자는 인스타그램 및 트위터를 통해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에게 '고액 스폰서(성매매) 알바를 하겠냐'며 접근했고 이에 응한 여성들에게서 신상정보와 신체 사진을 얻었다. 이를 악용해 여성들을 협박하여 가학적인 영상과 사진을 찍어 올리게 했다.

박사방이 n번방과 다른 점은 ▲가상화폐를 통해 영상을 판매하던 중 체포 ▲피해자 연령대 다양 ▲텔레그램 채팅방 다수를 운영하면서 경찰 수사에 대비하는 요령 공유 ▲관련 보도를 한 기자의 신상정보를 파악하고 유포한 점 등이 꼽힌다.

n번방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점은 지난 2월 14일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탁틴내일 등 4개 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한 텔레그램 성착취 대응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했고, 이 공동대책위가 60여 개 채팅방을 추가로 발견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채팅방의 중복 인원 및 가계정, 활성 IP(Internet Protocol address·인터넷규약주소)를 감안해 실제 이용자를 1만~2만 명으로 추산했다. 이는 디지털 성범죄 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도덕 불감증'을 그대로 반증하고 있다.

n번방 모방한 디지털 성범죄 유형

   
▲ 성착취 동영상 제작 및 유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사진=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n번방을 모방한 디지털 성범죄가 아직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성범죄'라는 용어는 지난 2015년 10월 28일 국내 음란물 최대 유통사이트였던 소라넷의 폐쇄 운동을 위해 '소라넷 아웃 프로젝트'가 피해자 지원을 위한 민간단체로 전환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여 여성의 인격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특히 스마트폰 모양의 캠코더 등 몰카·도촬 기술의 발전, 합성을 통한 동영상·사진 가공, 웹하드·다크웹·텔레그램과 같은 채팅앱·데이팅앱 등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제작·유포는 갈수록 확대·진화하고 있다.

유포 채널은 다양하다. 트위터·인스타그램·페이스북·텀블러와 같은 SNS를 시작으로 텔레그램·카카오톡·라인과 같은 메신저, 디스코드·다톡·앙톡·각종 DM 등 채팅어플, 아자르와 같은 화상채팅어플과 1인 방송, 웹하드, 토렌트, 해외 불법 포르노사이트, 온라인커뮤니티 등 무수히 많다. 유포 대상은 온라인 상의 불특정 다수를 포함해 가족·지인 등 피해자 주변인에게까지 이른다.

개별법상으로 디지털 성범죄 결과물은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불법촬영물 ▲딥페이크물로 나뉜다. 불법촬영물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제작된 성적 촬영물, 동의 하에 제작되었으나 동의없이 배포된 성적 촬영물로 구성된다. 딥페이크물은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피해자 및 음란물을 편집 합성해 제작한 성적 정보를 말한다.

   
▲ 적용법률과 사례에 따른 디지털 성범죄의 3가지 유형. 출처는 서울시·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2017년 발행한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41쪽./표 재구성=미디어펜
적용법률과 사례에 따라서는 크게 ▲촬영 ▲유포 ▲재유포라는 유형으로 나뉜다. 각 적용법률은 성폭력처벌법 및 정보통신망법에 따르며, 목적·장소·대상·동의 및 반복 여부로 구분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지난 2018년 12월 발행한 '온라인 성폭력 범죄의 변화에 따른 처벌 및 규제 방안' 연구에서 촬영방식에 따른 디지털 성범죄 유형에 대해 ▲몰카(비동의 촬영물) ▲합의 촬영물 ▲몸캠 등 셀프촬영 내지 자위영상 ▲준강간 촬영물(의식 없는 여성 대상) ▲강간 등 성폭력 행위 촬영물 ▲치마 속 도촬 ▲화상채팅 촬영물로 구분했다.

외국계기업 IT보안팀장인 한상기(39) 씨는 "게이머를 위한 VoIP 채팅 서비스인 디스코드(Discord)만 해도 디지털성범죄 서버가 100~150개에 달한다는 정보가 확인된다"며 "일부 유저들 사이에서는 개별 디지털성범죄와 범죄수익 간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아 수익 환수가 어려운 가상화폐를 이용한다는 지적이 많다"고 전했다.

   
▲ '디지털 성범죄' 가해행위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유형화./표=한국형사정책연구원
그는 "익명성에 기반한 텔레그램이나 다크웹의 경우 공개적인 접근이 어려워 피해자를 유인한 가해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어렵다"며 "스마트폰 등 다양한 디바이스 보급으로 한번 유포된 영상은 영구적인 삭제가 어려운 것이 적나라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수십만 가입자를 갖고 있는 국내 한 데이팅앱 운영사인 D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용자 중 대포폰을 통해 자기 신상정보를 위조하고 휴대폰 인증을 통과한 범죄자들을 가려내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이러한 범죄자들이 이성과의 메신저 채팅을 통해 자기 사진을 보여준다면서 압축파일을 다운 받게 하고 링크를 클릭하도록 유도하는데 이를 통해 피해자의 스마트폰을 해킹하는 게 최근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건전하고 상식적인 목적으로 데이팅앱에 들어왔다가 메신저를 통한 온라인 대화 과정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해킹당한 뒤 협박을 당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안전한 공공장소에서 직접 만남을 갖기 전까지 온라인 상으로 상대방을 100% 신뢰해선 안된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수상할 경우 경계하고 업체에 신고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촬영·제작·유포·소비 악순환 구조 속에서 피해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새겨질 가능성이 여전하다.

제 2의 n번방이 또다시 나오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와 경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