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킬러들의 수다'(2001)부터 '아는 여자'(2004), '웰컴투동막골'(2005), '거룩한 계보'(2006), '바르게 살자'(2007), '강철중: 공공의 적 1-1'(2008), '김씨 표류기'(2009), '이끼'(2010),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기묘한 가족'(2019)까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함께한 장본인이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청년의 얼굴은 압도적으로 강렬했다가도 어수룩하게 순수해지고, 소름 끼칠 정도로 음흉하게 변모하며 다양한 표정을 맛보는 쾌미를 알게 했다. 27년간 쉼 없이 달려온 배우 정재영의 이야기다.

이번에는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인 '노량: 죽음의 바다'로 스크린에 새로운 얼굴을 새겼다. 살아서 돌아가려는 왜와 전쟁을 완전히 끝내려는 조선의 난전, 그 속에서 정재영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조명연합함대를 함께 이끄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으로 분해 치열한 고군분투를 선보인다.


   
▲ '노량: 죽음의 바다'의 배우 정재영이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


"시나리오 읽었을 때 먹먹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훨씬 더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직도 (해전 중) 북소리가 심장소리처럼 들려오는 것 같아요. 시나리오로 봤을 땐 이런 느낌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영상으로 보니 감흥이 배가 되더라고요. 이렇게 어마어마할 줄 몰랐죠."

김한민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를 받았을 당시 느꼈던 먹먹함과 감동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정재영은 "작품의 묘사가 상투적이지도 않고 세련되면서도, 너무 감동적이고 재밌었다"며 '노량: 죽음의 바다'는 무조건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걸리는 부분은 딱 하나였어요. 외국어로, 그것도 명나라 언어로 연기가 가능할까? 그리고 외국어로 연기하는 것 치고 대사량이 생각보다 많아요. 전 외국어에 소질이 별로 없거든요. 전 그냥 감독님 믿고 가겠다고 했고 외국어 선생님을 모셔주신다고 안심시켜주시긴 했지만, 정말 막막했어요. '가나다라'부터 체계적으로 배우는 게 아니었거든요. 중국어를 듣고 지적받으면서 바로 대사 연습으로 들어가게 되니까. 억양에 따라 뜻이 완전 달라지고요. 제 말투가 투박한 데다 혀를 굴리는 발음이 많으니까 발음이 되게 어려워요. 해도 해도 늘지 않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첫 외국어 연기 소감을 묻는 말에 겸손하게 눙친 정재영이지만 영화 속 그의 연기를 마주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명나라의 언어를 소화하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을뿐더러 캐릭터 고유의 감정과 호흡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어 진린 그 자체임을 느끼게 한다.


   
▲ '노량: 죽음의 바다'의 배우 정재영이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


"진린은 사실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인물이고, 영화 속 상황들이 실재했어요. 진린의 입장에서 생각을 많이 했죠. 조선인의 입장이 아닌, 명나라에서 조선군을 도와주러 파견 온 장수니까. 일본을 도와주겠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게 목적인 거죠."

이순신과 진린의 관계성을 생각하며 역할에 더욱 몰두한 정재영. 그는 문헌상의 기록을 꼼꼼히 공부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더해, 때론 마찰하고 공조하는 두 장수의 화학작용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이순신을 향한 진린의 존경심은 굉장히 커요. 실제로 '어르신'이라는 존칭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진린의 직급이 연합사령관이니까 이순신보다 높고 나이도 두 살이 더 많아요. 진린이 바라봤을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장군다웠으면 그런 호칭을 썼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같은 장군으로서, 무인으로서 존경하지 않았을까…"

진린이라는 캐릭터의 본질이 잘 드러난 장면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칼을 들이대며 윽박지르는 모습과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목도하고 절규하는 모습을 꼽았다. 그는 "장면마다 액기스가 있지만, 명나라 장군으로서 진린의 마음과 이순신 장군을 향한 마음이 잘 보인 것 같다"고 전했다. 자신 역시 '노량: 죽음의 바다'를 촬영하며 이순신 장군에 대한 마음이 깊어졌다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애정도가 더 높아졌다고 할까요.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이런 분이 또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몇백 년 만에 한 번 나올 법한 귀한 인재인데. 각 시대의 장군님들을 소환해서 외계인과 싸워야 한다면 이순신 장군님이 꼽히지 않을까. 용기, 지혜, 덕 이걸 다 갖추셨단 말이죠."


   
▲ '노량: 죽음의 바다'의 배우 정재영이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


정재영은 '과몰입'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 참여한 것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며 굳건한 역사의식을 전했다.

"시나리오 읽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순신 장군님의 마지막이니까 이건 참여하자'는 거였어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함께해야 할 것 같은… 그래서 단순히 저를 위해 '연기 잘해야지', '내가 빛나야지' 이런 게 아니라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일에 흠이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더 컸죠. 혹여나 내가 누가 되지 않을까."

어엿한 중견배우의 궤도에 오른 정재영에게 어쩌면 '실'이 더 많았을 작품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명감 하나로 선뜻 함께했다. 언어적 핸디캡을 감수하며 그 시대 성웅의 곁을 지킨 정재영. 그가 있어 김윤석의 이순신은 더욱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다.


   
▲ '노량: 죽음의 바다'의 배우 정재영이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

   
▲ '노량: 죽음의 바다'의 배우 정재영이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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